출판계, AI 활용 출판물 '인간 검증' 여부로 3단계 표시제 도입
한국출판인회의를 비롯한 12개 출판 및 저작자 단체가 2026년 9월 29일 ‘독자를 위한 출판사와 저작자의 AI 사용 원칙’을 발표하며 인공지능(AI) 시대 출판 생태계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이는 AI 활용 출판물의 투명성을 높이고 독자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AI 활용 출판물을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해 표시하도록 권고한다.
이번 원칙의 핵심은 AI 활용 출판물을 '인간 저작물', 'AI 보조 저작물', 'AI 생성 출판물'로 나누고, 이 중 'AI 보조 저작물'과 'AI 생성 출판물'에는 AI 활용 사실을 명확히 표시하도록 한 점이다. 이는 AI의 관여도보다는 '저작권자로서 책임질 사람이 누구인지'를 기준으로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것이다.
'인간 저작물'은 AI를 단순 교정·교열, 개요 작성 등 보조적인 용도로 사용하고 인간이 창작의 주체인 경우를 의미하며, 별도의 AI 표시를 하지 않아도 된다. 반면 'AI 보조 저작물'은 인간이 창작한 내용을 AI로 보완했거나 AI가 생성한 내용을 활용했더라도 최종적으로 인간이 충분한 통제와 검증을 거쳐 완성한 저작물로, AI 활용 사실을 표시해야 한다.
'AI 생성 출판물'은 AI가 생성한 내용에 대해 인간의 실질적인 통제와 검증이 이뤄지지 않은 출판물을 지칭한다. 인간의 창작성이 없는 순수 AI 생성물은 원칙적으로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취지로 '저작물' 대신 '출판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AI 활용 사실 표시는 종이책의 경우 표지 안쪽, 판권지, 일러두기 면 가운데 한 곳 이상에 할 것을 제안했다. 전자책은 판권 정보에 AI 활용 여부를 표시하고 메타데이터에도 기계가 판독할 수 있는 정보를 포함하도록 했다. 오디오북은 재생 시작 부분에 음성으로 AI 활용 여부를 안내할 수 있다.
이번 가이드라인은 각 출판사가 자율적으로 선택하여 적용하며 강제성은 없다. 한국출판인회의는 이번 원칙이 AI 기술을 배척하거나 AI 생성물에 '주홍 글씨'를 새기려는 것이 아니라, 출판과 AI가 공존하는 환경에서 독자가 안심하고 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지난 2026년 7월 국내 출판사 188곳을 대상으로 진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 출판사의 76.1%가 AI를 활용하거나 시험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생성형 AI가 주요 콘텐츠를 제작한 출판물을 한 종 이상 발행한 경험은 20.7%에 그쳐, AI의 보조적 사용은 일상화되었지만 핵심 콘텐츠 생성은 아직 제한적인 단계로 분석된다.
이번 원칙에는 출판 계약서 작성 시 권고 사항과 자사 도서의 학습 데이터 활용에 관한 기준 등도 포함됐다. 저작자의 경우 AI를 활용한 단계와 그 범위를 출판사에 사전 고지하도록 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또한, AI가 출판물 학습에 이용되는 경우 권리자의 동의와 정당한 보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원칙도 명시했다.
한국출판인회의는 이번 포럼에서 제시된 표시, 계약, 권리정보 관리 방안을 출판 현장의 실천 과제로 구체화하고, 독자가 신뢰할 수 있는 출판 환경 조성을 위해 출판문화산업 진흥법 및 저작권법 개정 등 후속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는 2026년 2월 26일 '생성형 인공지능의 저작물 학습에 대한 저작권법상 '공정이용' 안내서'를 발간하며 AI 학습에 대한 저작권법상 공정이용 규정 적용 여부 판단 시 참고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한국저작권보호원은 2026년 10월 1일 창립 10주년을 맞아 'AI·글로벌 시대에 대응하는 저작권 보호 전문 기관'이라는 새 비전을 발표하며 지능형 저작권 침해 대응 고도화 등 4대 전략 방향을 수립했다. AI 기술 발전과 창작자 권리 보호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려는 출판계의 노력이 앞으로 어떤 제도적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